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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라 기초개요5

카발라 기초개요5

곧바른 빛이 거치는 네단계에 대한 서론

안녕하세요 “카발라가 밝혀내었다”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저는 토니 코즈넥입니다.

바알 하술람의 탈무드 에세르 세피롯(열 세피롯에 대한 연구)의 서문에서 인용한 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합시다.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카발리스트들은 모든 사람들이 카발라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하셨을까? 진실로 안에는 위대한 것이 있으니, 알려질 가치가 있다. 카발라의 지혜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이하고 귀중한 치료제가 존재한다. 비록 우리가 배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배우는 것을 이해하려는 갈망과 거대한 욕구가 있다면, 우리들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빛을 일깨운다

사람이 아직 완벽함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에게 오도록 되어있는 빛은 둘러싸는 이라고 간주된다. 말은, 빛은 준비되어 있으며, 사람이 그의 받음의 그릇을 정화시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럴 빛이 준비된 그릇에 입혀질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그릇이 없다고 해도, 그의 영혼에 연관된 빛과 그릇의 이름을 언급하며 지혜에 관여할 어느 정도의 빛은 곧바로 우리에게 비추어진다. 빛이 사람에게 비추어지기는 하나, 빛을 받을 있는 그릇을 채워 그의 영혼의 내면에 입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수행하는 동안 사람이 얻는 조명은   천상의 은총을 끌어내어 그에게 신성함과 고결함을 충분히 전해주고, 그로인해 사람은 완벽함에 훨씬 가까워지게 된다.   

이 수업에서 우리는 피조물의 창조에 관한 네가지 단계에 대하여 검토할 것입니다. 이 네 단계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대형 보기판입니다. 이로써 우주가 존재하게 된 방법, 피조물이 창조된 방법, 우주의 각 국면에서 모든 것들이 기원하게 된 방법 등이 설명됩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선 우리들은 토라에 신비함이 존재함을 알 필요가 있지만, 우리는 이를 다루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것입니다. 어떤 카발라 서적에도 토라의 신비함에 대한 이야기는 없으며, 오직 토라의 맛에 대해 말합니다.

 이 신비함은 ‘그의 본질’ 혹은 아쯔무토 라고 불립니다.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금지된다’라는 것은 불가능함을 뜻합니다. 이를 설명할 언어는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에겐 그릇(켈림)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달성할 때만 알려질 수 있답니다.

우린 여기서 시작합니다. 창조주와 함께 시작하지요. 카발리스트들의 말씀에 창조주의 시초의 생각은, 이 단계에 도달한 카발리스트들이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은 의도에서 시작되었고, 이 의도는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 피조물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 쇼레쉬(뿌리) 단계’라 불립니다. 이것이 모든 현실의 근원이지요.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에게 기쁨을 주려는 의지가 창조의 최초의 취지였기 때문에, 곧장 이 기쁨을 받으려는 의지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생각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빛’이고 이것은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그릇이죠. 이것이 최초의 피조물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삼라만상의 빛이 그 빛 전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채우지만, 이 그릇은 거의 무효합니다. 그것은 빛과 매우 잘 결합되어 있어서 실제로 이들은 동시에 생겨났으며, 완벽하게 상호 의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는 힘, 주려는 욕구가 있고, 이것이 압박을 가하여, 이 정반대의 욕구, 즉 받으려는 욕구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들은 함께 묶여 있지요. 그것들은 말하자면 하나의 생각에서 나온 부분이고 한 묶음이지만, 정반대이죠. 이것이 두번째 식별이라 불리고, 이는 ‘단계 알레프’입니다. 알레프는 히브루어 알파벳의 첫번째 문자이고, 그것은 1의 가치를 지니며, 이것이 첫번째 식별입니다.

빛이 이 첫번째 클리, 받으려는 의지 속으로 들어올 때 그 받으려는 의지는 기쁨을 느낍니다. 허나, 빛은 그 자체의 본성인 무엇을 그 클리 속으로 전달하고, 클리가 이것을 느끼는 결과로 어떤 일이 발생합니다.

이 빛이 끝까지 내려가서 이 받으려는 의지 내면을 전부다 채우게 될 때, 그 그릇은 빛 자체의 본성에 대한 어떤 것을 감지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받으려는 의지에 불과하므로, 그것의 프로그램을 토대로 움직이죠. 그것은 주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채요. 그래서 첫번째 식별은 ‘주는 자가 존재한다’입니다. 즉, 이것은 창조주가 아닌 첫번째 무엇입니다. 주는 상태가 존재하고 받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은 느낍니다. 어떤 것과의 연관 속에서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죠.  . 

 이 첫번째와 두번째 부분을 세피롯 특유의 표현을 통해 살펴봅시다.

첫번째 식별은 ‘케테르’ 혹은 ‘왕관’이라 불립니다. 두번째는 ‘호흐마’라 불리고요. ‘호흐마’는 지혜를 뜻합니다. 이 첫번째 피조물,  이 첫번째 단계의 피조물이 느끼는 이 빛은 환희입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자질에 대한 반응이죠. 피조물이 느끼는, 그 안에 들어오는 이 빛은 ‘지혜의 빛’(히브루어:오르 호흐마)이라 불립니다. 그러므로 카발라 텍스트에서 ‘지혜’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그것은 이 단계의 이 자질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주는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 결과로, 피조물은 또한 주려는 욕구의 즐거움을 느끼고, 이 즐거움을 가지고자 하죠.  받으려는 욕구인 것이죠. 이 욕구 안에서 새로운 식별이 생깁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안에서 이것이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죠, (우선 그것은 완전히 채워졌었죠, 그런 후에 빛의 자질 내에서 감지한 것이 그 안에 결핍됨을 느낀겁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스스로 이에 도달하려는 가운데, 더 이상 받기를 원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원하는 것은 주는 기쁨이고, 그래서 그 주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게끔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받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받지 않는 것 뿐이죠. 다시 말해, 그것은 빛을 거부합니다. 이 단계가 ‘단계 벳’이라 불립니다. ‘벳’은 히브루 알파벳의 두번째 문자이기도 하고, 그것은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낫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려는 욕구입니다.   

이제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단계1은 받으려는 욕구이고 단계 2는 주려는 욕구입니다. 이 세피라(단계2)는 ‘비나’라 불립니다. ‘비나’는 ‘힛보네눗’이라는 단어에서 오며, ‘관찰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관찰하고 깨닫는 것은 창조주의 자질입니다. 그것은 주는 것임을 인식하죠. 그러므로 이것은 베품의 자질이죠. 세피라 비나, 단계 벳,  단계2 말입니다.

이 공허의 상태에서 그릇은 또 다른 식별을 얻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들 단계들 내에서, 이들 식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빛의 행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빛의 행동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빛은 항상 이 근본 법칙만을 이용하지요.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것을 충족시킨다는 법칙요. 그것이 빛이 하는 유일한 일입니다. 우리가 논하고 있는 것은 클리 내에서, 욕구 안에서, 피조물 내면에서 변화하는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단계 벳 내부에서, 빛의 결핍 속에서, 발생하는 식별이 있습니다. 즉, 그것의 본성은 실제로는 받는 것이며, 그것은 지혜의 빛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 빛에 대한 거부, 빛을 되돌려줌을 일컬어 ‘자비의 빛’이라 합니다. (히브루어: “오르 하사딤”), 그것은 이렇게는 존재할 수 없음을, 그것은 받아야 함을 알고 있죠. 그러나 받는 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베품의 형태인 그런 받음의 방식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다음 깨달음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것이 단계 기멜, 히브루 알파벳의 세번째 문자입니다. 여기 이 식별이 두가지 단계를 초래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이 두가지 정반대의 것이 결합되어 있어요. 오르 호흐마를 받는 것 뿐만 아니라 이 단계는 오르 하사딤도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이들 두가지 정반대의 욕구들이 이 혼합된 단계 안에 포함되는 겁니다. 왜일까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이 같은 받음의 방식에서 단계 기멜은 받음을 주는 방법으로 전환시키는 길을 찾은 것이죠

창조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피조물과 창조주-빛과 그릇-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에요. 비록 피조물이 그 자신 내부에서 베푸는 행동을 한다고 느낀다고 해도, 실제로 피조물의 관점에서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오직 창조주 뿐입니다. 단계 기멜은 창조주의 행위를 복사하려는 결심을 하죠. 창조주가 그것이 기쁨으로 채워지기를 원함을 알고, 그것은 이 기쁨을 받아야만 함을, 그리고 피조물을 창조하여 베푸는 것이 창조의 생각의 한 부분임을 압니다. 여기서 피조물이 실제로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피조물은 자신 내면의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느 정도의 빛만을, 예를 들어, 빛의 20%만을 받으려는 결심을 하죠. 오직 창조의 생각을,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것을 기쁨으로 채우려는 창조주의 욕구를 이행할 목적으로 받는다는 조건하에서 받는 것이죠. 그렇게 받음으로써 이 창조의 생각을 이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받을 것입니다. 이는 받음이 베품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베품은 의도입니다. 행위가 어떻든지 상관없어요. 그것은 의도니까요. 그래서 실제로 이것은 단계0(케테르)과 어느 정도 형태의 동일성에 있습니다.  

이 80% 의 오르 하사딤(되돌아가는 빛)은 여전히 기쁨입니다. 그것 또한 그 안에 들어오는 빛이지만, 여기서는 이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세피롯에서 이 단계는 제이르 안핀이라 불리고, 실제로는 여러가지의 세피롯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헤세드, 게부라, 티페렛, 네짜흐, 호드, 예소드가 포함되지요. 이는 베풀기 위해서 받는 것을 허용하는 혼합된 단계입니다.

 단계 기멜이 흉내내는 베품의 행위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이 탄생합니다. 자신의 행위 때문에 단계 기멜은 여기서 빛의 또다른 자질을 느끼는데, 그 자질은 사실상 창조의 생각 그 자체지요. 단계 기멜이 얻은 성과는 단지 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자신에게 베푸려는 창조주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만을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창조의 생각은 피조물을 무한한 기쁨으로 완전히 채운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단계 기멜은 창조의 생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이 빛을 받아야만 함을 깨닫지요. 그 빛 전체를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빛이 들어와 전체 그릇을 채웁니다. 이것이 단계 달렛, 4이나, 이것은 단계 알레프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다른 일이 여기서 벌어졌어요. 왜냐하면 여기 단계 0, 1, 2, 3의 모든 행위는 독립적이지 않았거든요. 전 행위는 창조주에 의한 것이었지요. 빛의 힘, 매 단계 속에서 만들어진 반응과 욕구는 창조주가 한 행위였습니다. 단계 달렛에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일이 일어나죠. 단계 달렛은 창조주가 배치해둔 것을 정확히 행하며 존재하려는 독립적인 욕구입니다. 여기에는, 이 모든 빛을 받으려는 의도 속에는, 창조의 생각 그 자체와 동일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이 시점에서 피조물에겐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욕구의 성질 내에 제한이, 변화가 있습니다. 예전처럼 곧바른 빛을 받고, 이것을 스스로 성취하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단계 달렛이 가지는 이 마지막 식별 때문에 창조주의 위상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더이상 곧바른 빛을, 창조의 부분을 행하기를 원치않게 되고, 창조주의 마음을 원하게 됩니다. 창조에 대한 생각하는 부분 말입니다. 창조주와 형태의 동일성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실상 시초부터 창조주가 의도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여기서 창조 내의 다른 모든 것들이 시작됩니다. 독립적인 피조물이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세피롯에서 이 네번째 단계는 ‘말훗’이라 불립니다. 말훗은 ‘왕’ 혹은 ‘왕국’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합니다. 여기서는 욕구가 모든 것을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스스로만을 위해서 받지 않겠다는 이 새로운 의도는 창조주의 위상을 느끼기 때문인데요, 받는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며, 이것이 제한, 첫번째 찜쭘 이라 불립니다. 여기서부터는 창조의 행동이 아니라 창조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추구합니다.

여기 말훗이 있습니다. 창조의 시작이지요. 그리고 이 그릇, 이 네번째 단계는 ‘올람 에인 소프’라 불립니다. 이는 ‘끝없는 세상’을 뜻하고, 모든 세계들과 영혼들은 여기서 뻗어 나갑니다.

우주의 모든 것들은 정확히 이 형태를 이용합니다. 이 과정, 이 대형 보기판은 또한 네글자로 된 신의 이름입니다. 보신적이 있을 거에요. 유드의 정수리, 유드, 헤이, 바브, 낮은 헤이, 그래서 하바야하입니다. 이 이름은 이같은 일련의 힘을 나타냅니다.

카발라에서 모든 이름들과 단어들은 물리학에서의 공식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빛과 그릇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시다시피, 카발리스트들은 상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지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존재하게 된 방법이지요.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또한 그 지도는 우리가 위로 되올라가는 길에 습득해야만 하는 단계들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목적을 부여하고, 근원을 제공하며, 그 길을 따라 공간을 줍니다. 일단 이 제한을 두고 나면, 피조물은 이렇게 행동하는 겁니다. 피조물은 독립적인 욕구로서 창조의 생각에 도달하여 창조주와 동일해질 수 있도록 세계들이라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다음은 라이트만 박사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의 내면에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인간이 교정을 하면, 그에 따라 전체 우주가 창조주에 가까워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스스로를 교정해야 할 뿐이다. 상승해가는 인간은 그와 함께 전 세계들을 데려올라 간다. 그래서 모든 세계들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에 또 함께해주세요. 우리는 영적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기본 도구인 스크린 만들기에 대해 공부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창조주의 생각을 느껴서 창조주와 형태의 동일성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는 감지기랍니다.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수업에서 다루는 것은?

  • 창조주와 창조물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창조주는 또한 “빛”이라 불리고, 창조물은 또한 “그릇”이라 불린다. 창조주 고유의 성질은 베푸려는 의지이고, 창조물 고유의 성질은 받으려는 의지이다.
  • 창조는 다섯 단계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1. 베히나 쇼레쉬 (뿌리 단계): 창조주의 의도는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것을 완벽함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창조의 생각”이라 일컬어진다.
  2. 베히나 알레프 (단계 1): 창조주(빛, 베푸려는 의지)와 창조물(그릇, 받으려는 의지)가 완벽한 유착 속에 있음.
  3. 베히나 (단계2): 받는 것보다는 창조주처럼 주는 것이 낫다는 것을 이해하여, 창조주가 주는 기쁨을 받지 않으려는 피조물의 결정
  4. 베히나 기멜 (단계3): 창조주에게 베풀기 위하여 창조주가 주는 기쁨을 조금만 받으려는 피조물의 결정. 그 본성 안에 받는자가 되게끔 인쇄되어 있기에 피조물은 창조주처럼 순수하게 주는 자가 될 수 없음을 이해하고 이런 결정을 하게 됨.
  5. 베히나 달렛 (단계4): 피조물을 위하여 최초에 의도된 바가  그러하기 때문에,  창조주가 주려고 하는 모든 기쁨을 받으려는 피조물의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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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지혜 카발라: 더 평화로운 삶을 위한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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